본문 바로가기
영화 리뷰

[영화 리뷰] 더 파더 – 기억 속에서 길을 잃은 아버지, 그리고 무너져가는 세계(평범한 일상 속 균열부터 잊히는 것과 남는 것 순으로)

by pearl0226 2025. 8. 11.

더 파더 포스터
더 파더 포스터

 

‘더 파더(The Father, 2020)’는 노년의 치매를 주제로, 한 사람의 시선을 통해 ‘기억이 무너지는 과정’을 관객이 직접 체험하게 만드는 영화입니다. 플로리앙 젤레 감독이 자신의 연극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주인공 안소니 역을 맡은 안소니 홉킨스가 인생 최고의 연기 중 하나를 보여주며,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과 각색상을 수상했습니다. 단순한 병리 묘사가 아니라, 인간의 정체성과 관계의 붕괴를 깊이 파고드는 감정 드라마로서 큰 울림을 줍니다.

시작 – 평범한 일상 속에 스며드는 균열

안소니(안소니 홉킨스)는 런던의 한 아파트에서 혼자 살아가며, 여전히 스스로를 독립적이고 유능하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딸 앤(올리비아 콜먼)은 아버지의 기억이 점점 흐릿해지고, 사소한 일에도 의심과 혼란을 보이는 것을 걱정합니다. 간병인을 고용해도 안소니는 불신과 분노로 내쫓고, 반복해서 같은 질문을 하거나, 방금 들은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영화 초반부는 마치 평범한 가족 드라마처럼 시작되지만, 몇 장면이 지나면서 작은 ‘이상 신호’들이 나타납니다. 딸의 얼굴이 다른 배우로 바뀌고, 집 안의 가구와 벽지 색이 변하며, 시간 순서가 맞지 않는 대화가 이어집니다. 이 모든 변화는 관객이 ‘안소니의 시선’ 속에서 이야기를 따라가도록 설계된 장치입니다. 관객은 그와 함께 혼란에 빠지며,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기억인지 구분하기 어려워집니다.

혼란의 구조 – 치매의 내면을 경험하게 하다

‘더 파더’의 가장 혁신적인 지점은 치매라는 상태를 외부에서 관찰하는 대신, 주인공의 주관적 경험 속으로 관객을 끌어들이는 연출입니다. 사건이 순서대로 진행되지 않고, 이미 일어난 일이 다른 형태로 반복되며, 공간의 구조와 인물이 끊임없이 변합니다. 이는 단순한 플롯의 꼬임이 아니라, 치매 환자의 ‘흐트러진 시간감각’과 ‘불안정한 인식’을 영화적 언어로 재현한 것입니다.

특히 집 안의 변화는 미묘하면서도 불안감을 주는데, 같은 공간이 갑자기 색채와 구조가 바뀌어 나타나면서 관객이 순간적으로 방향 감각을 잃게 만듭니다. 이는 곧 안소니가 느끼는 혼란, 즉 “내가 알던 세상이 조금씩 변하고 있다”는 감각을 그대로 전이시킵니다.

연기 – 안소니 홉킨스의 절정

안소니 홉킨스는 이 영화에서 감정의 스펙트럼을 극단적으로 오갑니다. 때로는 유머와 매력을 발산하며, 스스로를 방어하려 애쓰고, 때로는 의심과 분노에 사로잡혀 거칠어집니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어린아이처럼 불안에 떠는 모습으로 변해버립니다. 그 모든 변화가 한 장면 안에서도 자연스럽게 이어져, 관객은 ‘배우의 연기’가 아니라 ‘실제 사람의 변모’를 목격하는 듯한 착각에 빠집니다.

올리비아 콜먼 역시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녀는 아버지를 향한 사랑과 책임감, 그리고 그로 인해 누적되는 피로와 절망을 섬세하게 표현합니다. 앤의 표정 속에는 ‘끝까지 지켜야 한다’는 의지와 ‘감당하기 힘든 현실’이 동시에 담겨 있어, 딸로서의 복잡한 감정을 절제된 연기로 전달합니다.

감정의 절정 – 모든 것이 무너진 순간

영화 후반부, 안소니는 결국 모든 시간과 관계를 잃어버리고, 어린아이처럼 “엄마”를 부르며 오열합니다. 이 장면은 단순한 슬픔을 넘어, ‘자아의 붕괴’가 주는 공포를 강렬하게 드러냅니다. 관객은 이 순간, 치매가 단순히 기억을 잃는 병이 아니라, 세상과 자신을 잇는 모든 연결이 끊어지는 과정임을 직감하게 됩니다.

앤은 그런 아버지를 조용히 안아주며 머리를 쓰다듬습니다. 말 한마디 없이 이루어지는 이 교감은, 기억과 논리가 사라진 자리에도 사랑과 유대가 여전히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영화는 이 장면을 절정으로 삼아, 관객의 감정을 완전히 열어젖힙니다.

영화적 의미 – 기억, 정체성, 관계

‘더 파더’는 단순히 한 질병을 다루는 영화가 아닙니다. 기억이란 무엇이며, 그것이 인간의 정체성과 관계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질문합니다. 안소니가 기억을 잃으면서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주변 사람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과거에 어떤 관계였는지 모두 흐릿해집니다. 이는 곧 “기억이 사라져도 우리는 여전히 같은 사람인가?”라는 철학적 물음으로 이어집니다.

또한 영화는 치매가 환자 개인만의 고통이 아니라,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도 깊은 상실과 혼란을 안긴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앤의 시선은 치매 가족이 겪는 현실—돌봄의 부담, 감정적 소모, 그리고 죄책감—을 절제된 방식으로 드러냅니다.

마무리 – 잊히는 것과 남는 것

‘더 파더’는 치매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관객이 단순히 이해하는 것을 넘어 직접 ‘체험’하게 만드는 드문 영화입니다. 안소니 홉킨스의 압도적인 연기와, 연극 무대처럼 한정된 공간을 활용한 세밀한 연출, 그리고 기억과 사랑을 동시에 이야기하는 대본이 어우러져, 짧지만 깊은 울림을 남깁니다.

결국 이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는 명확합니다. 기억은 사라질 수 있지만, 그 순간의 감정과 관계의 흔적은 완전히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그 잔향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마지막 버팀목이라는 것. ‘더 파더’는 우리에게 남겨진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기억 속’이 아니라 ‘현재’에서 붙잡아야 한다는 사실을 조용하지만 강하게 일깨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