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틸 앨리스(Still Alice, 2014)’는 리처드 글랫저와 워시 웨스트모어랜드 감독이 공동 연출하고, 줄리안 무어, 알렉 볼드윈, 크리스틴 스튜어트 등이 출연한 드라마 영화입니다. 리사 제노바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며, 50대 초반에 발병한 ‘초기 발병 알츠하이머병(early-onset Alzheimer’s disease)’을 다룹니다. 하버드 대학교 언어학 교수로서 완벽한 커리어와 행복한 가정을 꾸린 주인공 앨리스 하울랜드가, 점차 기억과 언어 능력을 잃어가는 과정을 섬세하고도 담담하게 그려냅니다. 줄리안 무어는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병과 싸우는 한 인간의 내면을 강렬하게 표현해냈습니다.
성공한 인생, 예상치 못한 진단
앨리스 하울랜드(줄리안 무어)는 언어학 분야에서 명성을 쌓은 하버드 교수이자, 세 자녀를 둔 어머니입니다. 그녀의 삶은 안정적이고 완벽해 보입니다. 하지만 어느 날 강의 중 단어가 떠오르지 않거나, 조깅 코스를 잊어버리는 등 이상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피로나 스트레스라고 생각했지만, 검진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녀는 드물게 50대 초반에 발병하는 유전성 알츠하이머병 진단을 받습니다. 영화는 이 순간부터, 관객을 앨리스의 시선 속으로 끌어들여 기억이 무너져가는 세계를 체험하게 합니다.
기억의 붕괴와 자기 상실의 공포
알츠하이머는 단순한 ‘기억 상실’이 아니라, 언어 능력, 사고력, 심지어 정체성까지 서서히 침식해갑니다. 앨리스는 강의 중 단어를 잊고, 딸의 공연 약속을 기억하지 못하며, 자신의 집 욕실 위치조차 혼동하기 시작합니다. 영화는 이러한 변화를 과장 없이, 일상의 작은 균열로 묘사합니다. 이로 인해 관객은 앨리스가 겪는 공포를 체감하게 됩니다. 특히 병이 진행될수록 ‘나는 여전히 나일까?’라는 질문이 그녀를 괴롭히는데, 이는 단순한 의학적 문제를 넘어 인간의 존재 의미를 묻는 철학적 질문이기도 합니다.
가족과의 관계, 그리고 사랑의 변화
병은 가족과의 관계에도 변화를 가져옵니다. 남편 존(알렉 볼드윈)은 사랑과 헌신 사이에서 갈등하며, 때로는 자신의 커리어와 간병인의 역할 사이에서 선택해야 합니다. 세 자녀 역시 각기 다른 방식으로 어머니의 변화를 받아들입니다. 특히 딸 리디아(크리스틴 스튜어트)는 배우를 꿈꾸며 뉴욕에서 독립적인 삶을 살고 있었지만, 점차 어머니 곁에서 시간을 보내며 관계를 회복해 나갑니다. 영화는 ‘간병’이라는 단어 속에 담긴 복잡한 감정—희생, 사랑, 피로, 죄책감—을 담담히 보여줍니다.
자신을 잃기 전에 남긴 메시지
앨리스는 병이 심해지기 전에 ‘미래의 자신’을 위해 영상을 촬영합니다. 기억을 잃어도 남아 있는 자신에게 약 복용 방법과 선택의 권리를 안내하는 영상이죠. 이는 그녀가 끝까지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권을 놓지 않으려는 노력의 상징입니다. 하지만 병이 진행되면서 그 영상마저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게 되고, 이는 관객에게 병의 잔혹함을 다시금 상기시킵니다. 영화는 이를 통해 알츠하이머가 단순히 ‘나이 든 사람의 질병’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깊고 무거운 현실임을 전달합니다.
연설 장면 – 인간 존엄의 선언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앨리스가 알츠하이머 환자 모임에서 연설하는 장면입니다. 그녀는 여전히 언어학자로서의 품위를 지키려 애쓰며, “나는 아직도 나입니다(I’m still Alice)”라고 말합니다. 이 짧지만 강렬한 대사는, 기억과 능력을 잃어가더라도 인간의 존엄과 존재의 가치는 유지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줄리안 무어는 이 장면에서 감정의 폭발 대신 억눌린 눈물과 떨리는 목소리로 관객의 마음을 울립니다.
마무리 – 기억이 사라져도 남는 것
‘스틸 앨리스’는 눈물 짜내는 멜로드라마가 아니라, 병과 함께 살아가는 과정을 현실적으로 그린 작품입니다. 감독은 불필요한 음악이나 극적 사건 대신, 일상의 변화를 통해 병의 진행을 보여주며 관객에게 더 큰 울림을 줍니다. 줄리안 무어의 연기는 단순한 ‘환자 연기’를 넘어, 인간이 기억과 정체성을 잃어가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구현합니다. 이 영화가 전하는 궁극적인 메시지는 명확합니다. 병이 인간의 일부를 앗아가더라도, 남아 있는 관계와 사랑, 그리고 ‘존재 그 자체’는 여전히 가치 있다는 것. 앨리스의 마지막 장면에서 리디아가 읽어주는 대사를 이해하지 못하는 듯 보이면서도, 감정만은 느끼는 모습은 그 사실을 조용히 증명합니다. ‘스틸 앨리스’는 우리 모두에게 기억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동시에, 기억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삶의 의미는 기억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마음속에도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